[세계의 사회적은행을 만나다] ④ 클라이밋 퍼스트 뱅크
신설 은행을, 그것도 오직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단 하나의 미션을 걸고 시작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처럼 들린다. 심지어 그 무대가 ‘안티-ESG(Anti-ESG)’ 정치 기조가 강한 미국 플로리다주라면 어떨까?
2021년 6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뛰어든 은행이 바로 클라이밋 퍼스트 뱅크(Climate First Bank, 이하 CFB)다. 놀랍게도, CFB는 설립 3년 만인 2024년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CFB는 협동조합이 아닌 ‘베네핏 코퍼레이션(Benefit Corporation)’이라는 상업적 틀 안에서, ‘핀테크 기술’과 ‘법적 미션’을 결합해 기후 금융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이들의 성공 방정식은 한국의 (가칭)가치금융신협에 ‘어떻게 기술과 제도를 활용해 임팩트를 확장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핀테크를 품은 은행, 기후 위기를 기회로 바꾸다
CFB의 비전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금융을 하라(Bank like tomorrow depends on it)’는 슬로건에 담겨 있다. 이들의 전략은 단순히 화석 연료에 투자하지 않는 소극적 방식이 아니다. 이들은 ‘청정 에너지 금융’이라는 명확한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한다. 그 핵심 무기는 바로 지주회사(Climate First Bancorp) 산하의 핀테크 자회사 ‘원에토스(OneEthos)’다. 은행(CFB)은 엄격한 금융 규제를 준수하며 안정성을 확보하고, 비규제 영역의 원에토스는 기술 혁신과 전국적 확장을 가속하는‘이중 구조’를 채택했다.
원에토스가 개발한 대표 상품 ‘FastTrack Solar Loan(패스트트랙 솔라 론)’은 딜러 수수료가 없는 투명한 디지털 대출 플랫폼으로, 고객의 태양광 설치 비용을 20~30% 낮췄다. 이는 2024년까지 누적 1억 5200만 달러의 대출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마침,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재생 에너지에 막대한 세액 공제를 제공하자, 플랫폼을 갖춘 CFB는 이 기회를 선점할 수 있었다. “플로리다주의 ‘Anti-ESG’ 압력이라는 정치적 상황도, OneEthos는 전국 50개 주를 아우르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유연하게 돌파했다.
미션과 수익을 동기화하는 ‘하이브리드 거버넌스’
상업은행은 어떻게 해야 처음 세운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고 꾸준히 갈 수 있을까? CFB는 처음 세운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내부에 일종의 ‘미션 보호 장치(거버넌스 방화벽)’를 만들어 두었다.
첫째, ‘베네핏 코퍼레이션(Benefit Corporation)’이라는 이라는 법적 형태를 선택했다. 이 형태는 이사회가 의사결정을 할 때 주주의 이익뿐 아니라 환경, 직원, 지역사회까지 함께 고려하도록 법적으로 요구한다.
둘째, 경영진의 보상 체계를 ESG 목표와 연결했다. 즉,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가치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가 보상과 직접 연결되어, 미션과 수익 목표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셋째, ‘미션 전문가 프로그램’을 도입해 전 직원이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교육을 꼭 받도록 했다. 참여 직원에게는 인센티브도 제공해, 2023년에는 직원 전체가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미션이 조직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한 B Corp(비콥) 인증(점수 98.6점) 획득과 GABV(가치기반은행 글로벌연합) 가입은 CFB가 이런 노력을 실제로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 신협에 던지는 질문: ‘핀테크’와‘제도’로 미션을 실행하라
협동조합과는 전혀 다른 이 모델에서, (가칭)가치금융신협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1. ‘임팩트 핀테크’를 중앙 허브로 구축하라: 개별 신협이 원에토스 같은 자회사를 만들 순 없다. 하지만 신협 중앙회가 핀테크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주도적인 플랫폼을 구축할 수는 있다. 이 ‘임팩트 허브’는 기후 금융(예: 주택 에너지 효율 개선)이나 사회적경제 대출처럼 전문성이 필요한 미션 금융 상품을 표준화·디지털화하여 모든 조합에 공급하는 것이다. 개별 조합은 기술 개발 부담 없이 관계 중심의 현장 영업에 집중할 수 있다.
2. ‘지역 유대’를 넘어 ‘가치 유대’로 연결하라: 전통적 신협이 ‘지역’이나 ‘직장’으로 묶였다면, CFB는 ‘기후’라는 ‘가치’로 전국의 고객을 모은다. 한국 신협도 ‘환경 보호 적금’, ‘사회적 약자 지원 예금’처럼 특정 가치에 공감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온라인 전용 상품을 개발해 전국 단위의 젊은 조합원을 유치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3. 미션 이행을 ‘경영 평가’에 연동하라: CFB가 경영진 보상을 ESG 목표에 연동했듯이, 신협도 조합장 및 경영진 평가에 재무 지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대출 비중’, ‘포트폴리오 탄소 배출량’ 같은 미션 지표를 의무화하고 비중을 높여야 한다. 이는 민주적 거버넌스 안에서 미션 실행력을 담보하는 강력한 장치가 될 것이다.
4. 기후 리스크를 ‘핵심 재무 리스크’로 관리하라: CFB는 PCAF・NZBA에 가입해 대출 포트폴리오의 탄소 발자국을 선제적으로 측정한다. 이는 홍보가 아닌 리스크 관리이다. 한국 신협도 기후 변화를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닌, 조합의 생존과 직결된 핵심 금융 리스크로 인식하고 포트폴리오 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제언: 신협, 기술의 날개를 달고 가치를 향해 나아가다
클라이밋 퍼스트 뱅크(CFB)는 ‘명확한 미션(기후)’, ‘법적 보호 장치(베네핏 코퍼레이션)’, 그리고 ‘강력한 실행 엔진(핀테크)’이라는 세 가지 축을 정교하게 결합했다. 그 결과, 설립 4년 만에 고속 성장과 흑자 전환을 동시에 달성하며, ESG 가치 추구가 오히려 강력한 ‘비즈니스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데자르댕(사회운동 연계)과 밴시티(규모와 포용의 조화)라는 강력한 협동조합 모델, 그리고 시티 퍼스트 뱅크(정책 자본 활용)와 클라이밋 퍼스트 뱅크(핀테크 기술 결합)라는 혁신적인 주식회사 모델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금융이 사회적 가치와 결합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칭)가치금융신협을 비롯한 한국 신협의 미래는 이들의 핵심 성공 원리인 ‘흔들림 없는 미션, 진화하는 거버넌스, 시대에 맞는 기술 혁신, 그리고 외부 자원과의 과감한 연대’를 한국의 토양에 맞게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달려 있다. CFB가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도전 속에서 핀테크라는 날개를 달았듯이, 한국의 신협들도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담대한 혁신에 나서야 할 때이다.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B Corp(비콥) 은행이자 지역 커뮤니티 재투자에 집중하여 '모두를 위한 번영'을 추구하는 선라이즈 뱅크(Sunrise Bank)의 사례를 통해, 가치금융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해 본다.
We Fund Value – 세계의 사회적은행을 만나다.
우리는 지금, 가치로 금융을 다시 쓰는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칭)가치금융신협은 시민이 예금하고 시민이 투자하는 새로운 금융의 형태를 모색하며, 사회혁신과 금융이 만나는 지점을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그 첫 걸음으로, 우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이미 ‘가치에 투자하는 은행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We Fund Value’ 시리즈는 세계 가치기반은행 네트워크인 GABV(Global Alliance for Banking on Values) 회원사 30곳의 철학과 실천을 다룬 기록입니다. 독일의 GLS은행, 캐나다의 데자르뎅, 스페인의 라보랄쿠차 등 각기 다른 문화와 제도 속에서 꽃피운 사회적은행들의 이야기입니다.
“돈은 어디로 흘러가야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질까?”
이 질문은 단지 금융의 기술이 아니라, 금융의 윤리와 존재 이유를 되묻는 물음입니다.
‘We Fund Value’는 이 질문에 대한 30개의 답이자, 우리가 만들어갈 (가칭)가치금융신협의 밑그림입니다.
본 시리즈는 2025년 11월부터 2026년 2월까지 매주 두 차례 총 15주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며, (가칭)가치금융신협 홈페이지(누르면 연결)에 상세한 분석리포트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배우고, 또 묻습니다.
사회적은행은 어떻게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가?
금융이 지역공동체의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의 (가칭)가치금융신협은 어떤 모델로 성장해야 하는가?
금융의 언어로 사회를 다시 상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진 소임리포터
한국사회혁신금융 대표이자 사단법인 사회혁신기업가네트워크 상임이사.금융과 사회혁신 분야의 전문가로, 10년 넘게 사회적금융의 제도적 토대와 생태계를 구축해왔다.사회적경제 기업과 창업가들에게 실질적인 자금 지원과 맞춤형 금융 컨설팅을 제공하며, 자조기금, 사회투자기금, 신협 설립 등 다양한 금융 모델을 실험해왔다.우리금융지주, AT Kearney, Accenture, 삼정KPMG등에서 금융기관의 전략적 혁신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이는 그가 새로운 금융 모델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현재는 (가칭) 가치금융신협출범을 주도하며, 글로벌 가치기반은행의 네트워크(GABV)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형 사회적은행 모델을 설계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