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사회적은행을 만나다] ⑥ 시빅 페더럴 신협
40년 동안 다른 기관의 전산망과 지점을 빌려 써 온 신협이 있다. 자산 규모가 수조 원에 달하고 조합원이 40만 명이 넘는데도, 자체적인 핵심 인프라가 없었던 이 기묘한 동거. 노스캐롤라이나의 시빅 페더럴 신협(Civic Federal Credit Union, 이하 Civic FCU)과 그 모체인 지방정부 연방 신협(LGFCU)의 이야기다.
2024년, 이들은 '남의 집 살이'를 끝내고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독립의 핵심 무기는 바로 '디지털'이었다. 레거시(구형)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미래형 디지털 신협을 새로 짓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파격적인 '디지털 독립 선언'은 오래된 시스템과 관행 속에 갇혀 혁신을 주저하는 한국 신협들에게 강렬한 충격파를 던진다.
40년의 동거, 그리고 위기 속의 결단
LGFCU는 1983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공무원 신협(SECU)에서 분리되어 나온 지방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되었다. 하지만 맨땅에서 시작하기엔 비용이 너무 컸기에, SECU의 지점망과 IT 시스템을 빌려 쓰는 독특한 위탁 운영 방식을 택했다.
이 기묘한 공생은 LGFCU가 자산 4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동시에 족쇄가 되었다. 2013년, SECU가 일방적으로 상업 대출 중단을 선언하자 LGFCU의 핵심 조합원인 소방서 등에 대한 대출 길이 막히는 위기가 닥쳤다. 게다가 위탁 수수료는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24년 기준 LGFCU가 SECU에 지불한 수수료는 무려 6300만 달러(약 870억 원). 벌어들인 수익의 4분의 1을 고스란히 '월세'로 내야 하는 구조였다. 이는 조합원에게 더 좋은 금리를 제공하거나 새로운 기술에 투자할 여력을 갉아먹는 만성적인 출혈이었다.
결국 LGFCU 이사회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그들은 단순히 시스템을 바꾸는 것을 넘어, 미래형 신협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2018년, LGFCU의 자회사이자 혁신의 인큐베이터인 Civic FCU가 탄생했다.
디지털 샌드박스에서 미래를 실험하다
Civic FCU는 LGFCU의 '디지털 샌드박스'였다. 40만 조합원이 있는 거대 조직인 LGFCU를 한 번에 뜯어고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대신 그들은 가볍고 민첩한 별동대인 Civic을 먼저 출범시켜 최신 핀테크 기술과 디지털 전용 프로세스를 마음껏 실험했다.
물리적 지점 없이 100% 모바일로만 운영되는 Civic은 LGFCU가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이었다. 이들은 "사람(People), 지구(Planet), 번영(Prosperity)"이라는 삼중 미션을 내걸고, B Corp 인증과 가치기반은행연합(GABV) 가입을 통해 윤리적 금융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2024년, 실험은 끝났다. LGFCU와 Civic의 조합원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두 조직의 합병을 승인했다. 이는 단순히 두 회사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 모체인 LGFCU가 자회사인 Civic이 구축한 최신 디지털 엔진으로 '환골탈태'하여 이주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정에서 돋보인 것은 '1000명의 자문위원회'였다. 경영진은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대신, 1000명이 넘는 조합원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독립의 필요성과 진행 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이는 거대한 변화에 수반되는 불안을 잠재우고, 조합원들을 혁신의 지지자로 만드는 결정적인 '리스크 관리' 전략이었다.
한국 신협에 던지는 질문: ‘혁신’을 아웃소싱할 것인가?
LGFCU와 Civic의 사례는 한국 신협에 질문을 던진다.
1.‘디지털 독립’을 준비하라: 한국 신협도 중앙회 전산망에 의존하고 있다. 효율적이지만, 개별 조합만의 특색 있는 서비스를 내놓기엔 한계가 있다. Civic처럼 중앙회 주도로 '디지털 혁신 자회사'를 설립하여, 개별 조합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하고 혁신적인 핀테크 플랫폼을 개발해야 한다.
2.혁신의 ‘테스트베드’를 만들어라: 기존 조직을 통째로 바꾸려다간 저항에 부딪히기 쉽다. LGFCU가 Civic이라는 별도 조직을 통해 미래를 실험했듯, 한국 신협도 사내 벤처나 독립 사업부 형태의 '혁신 랩(Lab)'을 만들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상품과 기술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어야 한다.
3.조합원을 ‘혁신의 파트너’로 삼아라: LGFCU의 성공 비결은 1000명의 자문위원회였다. 한국 신협도 총회의 형식적 의결을 넘어, 조합원 자문단이나 청년 이사회를 구성해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조합원의 동의 없는 혁신은 모래성일 뿐이다.
미래를 향한 제언: 껍질을 깨는 고통만이 날개를 만든다
LGFCU는 40년의 안락한 의존을 버리고, 거친 광야로 나가는 독립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적자도 감수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대가로 그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직 조합원만을 위해 기술과 자원을 쓸 수 있는 '자유'와 '미래'를 얻었다.
한국의 신협들도 낡은 관행과 시스템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Civic의 사례처럼, 과감한 디지털 결단과 진정성 있는 조합원 소통이 결합될 때, 신협은 핀테크 공룡들과 당당히 경쟁하며 '사람 중심 금융'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미국 동부의 작은 주, 버몬트에서 '필요'가 아닌 '전략'으로 뭉친 두 신협의 합병 이야기, 이스트라이즈 신협(Eastrise Credit Union)의 사례를 통해 규모의 경제와 가치 지향을 동시에 잡는 법을 알아본다.
We Fund Value – 세계의 사회적은행을 만나다.
우리는 지금, 가치로 금융을 다시 쓰는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칭)가치금융신협은 시민이 예금하고 시민이 투자하는 새로운 금융의 형태를 모색하며, 사회혁신과 금융이 만나는 지점을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그 첫 걸음으로, 우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이미 ‘가치에 투자하는 은행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We Fund Value’ 시리즈는 세계 가치기반은행 네트워크인 GABV(Global Alliance for Banking on Values) 회원사 30곳의 철학과 실천을 다룬 기록입니다. 독일의 GLS은행, 캐나다의 데자르뎅, 스페인의 라보랄쿠차 등 각기 다른 문화와 제도 속에서 꽃피운 사회적은행들의 이야기입니다.
“돈은 어디로 흘러가야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질까?”
이 질문은 단지 금융의 기술이 아니라, 금융의 윤리와 존재 이유를 되묻는 물음입니다.
‘We Fund Value’는 이 질문에 대한 30개의 답이자, 우리가 만들어갈 (가칭)가치금융신협의 밑그림입니다.
본 시리즈는 2025년 11월부터 2026년 2월까지 매주 두 차례 총 15주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며, (가칭)가치금융신협 홈페이지(누르면 연결)에 상세한 분석리포트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배우고, 또 묻습니다.
사회적은행은 어떻게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가?
금융이 지역공동체의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의 (가칭)가치금융신협은 어떤 모델로 성장해야 하는가?
금융의 언어로 사회를 다시 상상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진 소임리포터
한국사회혁신금융 대표이자 사단법인 사회혁신기업가네트워크 상임이사.금융과 사회혁신 분야의 전문가로, 10년 넘게 사회적금융의 제도적 토대와 생태계를 구축해왔다.사회적경제 기업과 창업가들에게 실질적인 자금 지원과 맞춤형 금융 컨설팅을 제공하며, 자조기금, 사회투자기금, 신협 설립 등 다양한 금융 모델을 실험해왔다.우리금융지주, AT Kearney, Accenture, 삼정KPMG등에서 금융기관의 전략적 혁신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이는 그가 새로운 금융 모델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현재는 (가칭) 가치금융신협출범을 주도하며, 글로벌 가치기반은행의 네트워크(GABV)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형 사회적은행 모델을 설계 중이다.
